[뉴욕 와인 산지 탐방①]빙하가 빚고 호수가 키운 땅, 핑거레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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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부 뉴욕주 한가운데, 수백만 년 전 빙하가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길고 깊은 호수들이 남았다. 그 호숫가를 따라 오늘날 130개 이상의 와이너리가 어깨를 맞대고 있다. 미국을 대표하는 리슬링 산지이자 세계적인 쿨 클라이밋 와인 명소, 핑거레이크스(Finger Lakes)다.
뉴욕와인생산자협회의 초청으로 국내 와인업계 관계자들이 이 산지를 직접 찾았다. 비노에이치 우명학 대표, 에노테카코리아 김진섭 대표, 가라지와인 최윤호 대표가 동행해 주요 와이너리를 순례하고 생산자들의 와인을 시음하며 핑거레이크스의 경쟁력과 성장 가능성을 눈으로 확인했다.
전통을 잇는 역사적인 생산자부터 새로운 실험에 도전하는 차세대 와이너리까지, 이번 방문은 뉴욕 와인이 지닌 다양성과 무한한 잠재력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앞으로 국내 소비자들에게도 뉴욕 와인의 새로운 매력을 소개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빙하와 호수가 만든 테루아
핑거레이크스는 수백만 년 전 빙하가 이동하며 형성한 길고 깊은 호수들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가장 깊은 곳이 180m를 훌쩍 넘기는 이 호수들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와인의 품질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호수는 여름철 열을 저장했다가 가을과 겨울에 천천히 방출하며 포도밭의 기온을 조절한다. 덕분에 혹독한 겨울 추위 속에서도 유럽계 포도 품종 재배가 가능하고, 높은 산도와 섬세한 풍미를 갖춘 와인이 빚어진다. 1982년 AVA(미국 포도 재배 지역)로 공식 지정된 이곳에는 현재 130개 이상의 와이너리가 자리하며, 짜릿한 산도와 미네랄, 라임과 풋사과, 백도의 풍미를 품은 드라이 리슬링은 독일 모젤과 비교될 만큼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핑거레이크스를 만든 사람들, 그리고 지금의 생산자들
① Dr. Konstantin Frank, 모든 것이 시작된 곳
핑거레이크스 와인 역사의 출발점으로 불리는 생산자다. 우크라이나 출신 포도재배학자 콘스탄틴 프랑크는 1950년대, 이 지역에서 유럽 품종 재배가 불가능하다는 통념을 깨고 리슬링과 샤르도네를 심으며 이른바 '비니페라 혁명'을 이끌었다. 현재는 4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으며, 드라이 리슬링과 전통 방식 스파클링 와인은 여전히 이 지역을 대표하는 스타일로 평가받는다.
② Bully Hill Vineyards, 괴짜 천재가 남긴 유산
핑거레이크스에서 가장 개성 있는 와이너리 중 하나다. 창립자 월터 테일러는 뉴욕산 포도의 가치를 강조하며 독자적인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프렌치-아메리칸 하이브리드 품종을 중심으로 한 와인 생산은 물론, 예술적 감성을 더한 와이너리로도 유명하다. 코넬대학교가 육종한 트라미네트, 카유가 화이트, 누아레 같은 품종들이 지금도 이곳 포트폴리오의 중심을 이루며, 와인 박물관과 아트 갤러리를 함께 운영하며 지역 문화 공간의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③ Weis Vineyards, 모젤에서 건너온 새 강자
독일 모젤의 첼(Zell) 출신 6대째 와인메이커 한스 페터 바이스(Hans Peter Weis)와 해먼즈포트 토박이인 아내 애슐리가 2017년 문을 열었다. 페터는 큐카 호수 주변 토양의 슬레이트 함량과 미네랄, 물이 빚어내는 미세기후가 고향 모젤과 닮았다고 보았다.
비교적 신생 와이너리임에도 성장세가 가파르다. 2022년과 2024년 두 차례나 뉴욕주 '올해의 와이너리(Winery of the Year)'에 선정되었고, 2024년에는 2018 리슬링 아이스 와인으로 최고 영예인 주지사 컵까지 거머쥐었다. 독일식 드라이 와인을 근간으로 하면서도 아이스 와인 같은 스위트 스타일에서도 정점의 품질을 보여준다.
④ Hermann J. Wiemer, 핑거레이크스 리슬링의 표준
핑거레이크스 리슬링의 기준으로 꼽히는 생산자다. 독일 모젤 출신 헤르만 비머가 설립했으며, 오래된 포도밭과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을 바탕으로 뛰어난 단일 포도밭 리슬링을 생산한다. 토착 효모 발효와 재생농업을 고집하는 이들의 철학은 현 공동 소유주인 프레드 머워스와 오스카 빈케에게로 이어지며, 지속가능 농업과 재생농업 분야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의 진가는 밭에 있다. HJW, 막달레나, 요제프 같은 단일 밭 리슬링은 같은 호숫가에서도 고도와 토양, 일조에 따라 와인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교과서처럼 보여준다.
⑤ Ravines Wine Cellars, 드라이 리슬링의 개척자
오늘날 핑거레이크스가 '드라이 리슬링의 산지'로 불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생산자다. 프랑스 출신 와인메이커 모르텐 할그렌이 설립했으며, 미네랄감이 뚜렷한 본 드라이 스타일을 이 지역에 정착시켰다. 2003년 개장 두 달 만에 드라이 리슬링으로 국제 대회 우승을 차지한 이래 라빈스는 본 드라이(bone-dry) 리슬링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부르고뉴식 피노 누아와 보르도 블렌드, 전통 방식 스파클링까지, 구세계의 절제와 신세계의 활력을 동시에 담아낸다.
⑥ Six Eighty Cellars, 토기 속에서 익어가는 실험
핑거레이크스의 실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티크 와이너리다.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테라코타와 점토 항아리(암포라), 콘크리트 에그, 프랑스산 사암 발효조까지, 6000년 된 토기 양조법을 현대적으로 되살린다. 샤르도네와 피노 누아를 중심으로 그뤼너 펠트리너, 피노 뮈니에 같이 이 지역에서 보기 드문 품종에도 과감히 도전한다.
토착 효모와 최소 개입을 원칙으로 한 이들의 와인은, 핑거레이크스가 리슬링 너머로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⑦ Ria's Wines, 소노마에서 온 새로운 물결
가장 젊고 역동적인 생산자 가운데 하나다. 캘리포니아 소노마에서 이주한 리아 다베르사와 마이클 펜 부부가 설립했으며, 자연 발효와 재생농업을 기반으로 차세대 핑거레이크스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이 인수한 부지에는 수령 최고 40년에 달하는 고목 리슬링, 카베르네 프랑, 렘베르거 등이 심겨 있다. 세네카 호수에서 약 300m 떨어진 완만한 비탈, 현지에서 '바나나 벨트'라 불리는 온화한 구역이다.
화이트는 압착 시 긴 침용을 거쳐 질감과 미네랄을 끌어올리고, 레드는 발로 으깨 자연 발효를 유도한다. 2025년부터 재생농업을 시작해 2028년 인증을 목표로 하는, 핑거레이크스 차세대 생산자의 패기가 잔에 그대로 담긴다.
⑧ Element Winery, 극한 기후의 잠재력을 증명하다
마스터 소믈리에이자 셰프인 크리스토퍼 베이츠가 이끄는 생산자다. 그는 핑거레이크스를 '쿨 클라이밋'이 아닌 '극한 기후' 산지로 정의하며, 긴 숙성을 통해 지역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는 와인을 선보인다. 혹독한 겨울과 뜨거운 여름이라는 극단적 조건 속에서 빚어진 와인은 제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엘리먼트의 와인은 언제나 평균보다 오래 숙성된 빈티지로 출시된다.
손 수확 포도만을 사용하고 오크나 첨가물 없이 양조하는 것이 원칙이다. 리슬링과 샤르도네에서도 빼어나지만, 무엇보다 피노 누아·카베르네 프랑·시라 같은 적포도에서 진가를 드러낸다. "이 지역은 진지한 와인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던 그가 빚어낸 레드 와인들은, 그 통념이 얼마나 빗나갔는지를 분명하게 증언한다.
리슬링을 넘어, 더 넓은 세계로
이번 핑거레이크스 탐방은 뉴욕 와인이 단순히 리슬링 하나에 기댄 산지가 아님을 거듭 확인하는 여정이었다. 역사 깊은 생산자의 뚝심과 신세대 와인메이커의 실험 정신, 그리고 빙하와 호수가 만들어낸 빼어난 테루아가 한데 어우러지며 핑거레이크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화하고 있다.
스파클링부터 적포도, 암포라 숙성 내추럴 와인까지. 핑거레이크스가 펼쳐 보이는 스펙트럼은 이제 세계 어떤 쿨 클라이밋 산지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국내 소비자들이 뉴욕 와인의 새로운 얼굴과 만나는 날도 머지않았다.
글 지현애 기자 사진 안웅철(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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